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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일 그리고 고금 독보의 용사이며,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린 "혼다 타다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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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다 타다카츠  혼다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입니다. 미카와국 구라마에에서 혼다 타다토요의 장손이자, 혼다 타다타카의 장남으로 출생합니다. 관례 후 받은 이름은 타다카츠, 아명은 나베노스케, 통칭은 헤이아치로이죠.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리던 당시 풍습에 따라 보통 헤이하치로라 불렀습니다. 관직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우선하였기에 타다카츠의 경우는 보통 나카츠카사노다이후라고도 불립니다. 출생 직후에 오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사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합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동이 됐다고 하며, 1560년에 관례를 치르고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라 칭하며 오케하자마 전투에 첫 출전을 합니다. 1563년 미카와에서 일어난 일향종의 난이 발생했던 그 당시, 대부분의 혼다 일족이 도쿠가와 가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타다카츠는 일향종에서 정토종으로 개종하며 도쿠가와 가문에 남아 무공을 세웠지요. 이후 1570년에는 이네가와 전투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군의 선두에서 대활약했지요.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은상을 수여받는 동시에 "혼다 타다카츠의 용맹은 삼국지 장비에 비견된다."고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1572년에 다케다 군이 도쿠가와령을 침곰했을 때 히토코토자카 전투에서는 패퇴하는 아군의 후위를 맡아서 분전했고, 그 활약을 지켜본 다케다 휘하의 무장 코스기 사콘이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가지 있으니, 당나라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로이니라."라는 낙서를 통해 그의 용맹스러움을 칭찬합니다.  말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측근을 혼다 마사노부 부자 등, 관료 타입의 문치파로 채웠고, 타다카츠 본인도 1604년에 병에 걸리면서 권력에서 멀어집니다. 1609년 경에 가독을 장남 혼다 타다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 이듬해 12월에 영지인 구와나에서 병사합니다. 같은 사천왕 동료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타다카츠의 후손들은 잦은 이봉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나마 야스마사의 후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20세의 나이로 임진왜란 총대장을 맡은 "우키타 히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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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키타 히데이에  히데이에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요이고, 아명은 하치로입니다.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으로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 석의 다이묘였지요. 히데이에의 별명은 비젠의 재상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170cm의 큰 키를 가졌었고, 아버지와는 다르게 성실하고 인정이 깊었다고 하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고 임진왜란에서는 20세의 나이로 총대장을 맡았으며, 1년 후 행주대첩에서 승자총통을 연결한 변이중 화차의 포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8살 경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배했습니다. 그리하여 83살에 사망하는 그 날까지 무려 55년 동안 태평양의 작은 섬 하치조마치에서 유배 생활을 합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1581년 부친인 우키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10살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2년 가독을 계승하고 영지를 보장받게 됩니다. 이후 우키타는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의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히데요시는 말년에 요도도노가 아들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를 낳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를 많이 들였으며 우키타도 아들처럼 여기며 매우 아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 후계자였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죽고 다른 양자들이 다른 집안으로 보내지는 와중에도 히데이에는 양자로 잘 살았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우키타 히데이에는 총대장 겸 제8군 사령관으로서 참전합니다. 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의 굵직한 전투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를 아꼈던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키면 조선의 통치자로서 히데이에를 임명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신뢰받는 양자였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서군에 속하여 초반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배신으로 전세가 급속히 불리해지자 결국 패배,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로 도망칩니다. 곧 시마즈 가문이 그를 숨기고 있다는 ...

일본 전국시대 3효웅 중 한 명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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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도산  사이토 도산은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으로 유명하죠.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의 전반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크게 전반부의 주역은 사이토 도산, 후반부의 주역은 도산의 제자이자 정신적인 후계자처럼 묘사되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오다 노부나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산은 살모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이에 걸맞게 '하극상의 효웅', '오다 노부나가의 스승 겸 장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행적이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정확한 인물상이나 행보를 명확히 하기는 어려운 인물이죠. 살모사라는 별명 역시 사료나 문서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현대 소설의 창작입니다. 정실 부인 오미노카타는 아케치 집안 출신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고모에 해당됩니다. 이 정실 부인의 소생이 키쵸, 흔히 노히메라 알려진 여성입니다. 그래서 미츠히데는 도산의 조카가 됩니다. 사이토 도산은 기쵸를 아주 사랑하여 '바보'라는 소문이 난 오다 노부나가와 결혼시키는 걸 상당히 꺼렸습니다. 도산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에게 여러 번 겨뤘는데 다 이겼습니다. 사실 딸을 보냈을 때에도 '바보'라고 소문난 오다 노부나가를 잘 구슬려 오다 가문의 땅을 차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쇼토쿠사라는 절에서 직접 만난 후 오다 가문의 땅을 빼앗을 생각이나 의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게 많은 소설가들과 사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이 첫 번째 만남에서 효웅 도산을 감복시킨 천재 오다 노부나가의 모습이 일본 역사 소설에는 꽤나 많이 차용되는 소재이지요. 실제 역사에서 도산이 노부나가에게 첫 만남 이후 감복해 전폭적으로 도와주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애초에 '도산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감복했다.'는 기록 자체가 오다 가 측의 사료이죠. 사이토 ...

서국 제일의 다이묘이자, 모리 가 3형제의 아버지인 "모리 모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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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 모토나리  모토나리는 일본 센고쿠 시대에 오늘날의 히로시마현 서부인 아키의 다이묘입니다. 여러 가지 모략으로 유명해서 모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며 서국 제1의 다이묘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모리 가문 3형제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아들들의 성씨가 각각 다른데, 다른 집안에 일단 양자로 넣은 후 모략으로 해당 가문의 영지를 집어삼켰기 때문입니다. 1497년, 아키의 호족인 모리 히로모토와 역시 아키의 호족으로 모리 가문의 방계 출신 후쿠바라 부인의 2남으로 태어납니다.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주고쿠 지방에서 전통의 오우치 가문과 함께 양대 세력으로 떠올랐던 신흥 강자 아마고 츠네히사의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지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는 5세 때 잃고, 아버지는 10세 때 잃고, 형은 19세에 잃었네요. 17세 때는 명나라 사람들이 모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들 중 관상을 잘 보던 사람이 모토나리를 보고는 한 고조, 당 태종의 풍모가 있다고 평한 적도 있습니다. 외교와 모략에 능통하여, 신흥 강자인 이즈모 아마고 가문과 전통의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문을 보전합니다. 한편, 그의 모략의 특징은 장기간에 걸쳐 끈기 있게 계략을 짠다는 것으로 화려함은 없지만 주로 내부의 정치적인 조략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 편이었죠. 세 화살의 교훈이란 얘기로도 유명합니다. 모토나리가 세 아들을 불러 놓고 화살 하나하나는 쉽게 꺾이지만 화살 세 개를 한꺼번에 꺾을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며 형제 간의 우애 및 가족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내용이죠. 정실 사후에는 측실을 들였고, 측실과 유능한 아들들이 그를 계속 보좌했으며 금주를 생활화하는 것처럼 평생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에 측실들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막내는 71세의 나이에 얻었다고 합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모리 히데카네로,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도요토미에 인질로 들어가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의형제...

임진왜란 시기 대마도의 다이묘였던, 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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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요시토시  요시토시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쓰시마 섬의 다이묘입니다. 기리시탄(기독교)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다리오(Dario)이죠.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니시의 사위이지요. 요시토시는 원래 종교가 없었으나 장인의 권유로 가톨릭에 입교하고 독실한 신자가 됩니다. 무엇보다 조선에게 중요한 점은 그가 임진왜란 시기 대마도의 다이묘라는 점이고요. 대마도는 원칙적으로는 다이묘 집안이 일본계인만큼 일본 영토를 지향했으나 실질적으로 당시 반조선 반일본 같은 반반 포지션을 가져가던 지역이기에, 대마도 다이묘(당주)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했습니다. 또 당주 후계자로 어릴 때 낙점되면 10대 이전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었고, 늦게 낙점된 사람도 바로 조선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당연히 소 요시토시도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쓰시마 소씨 20대 당주였으며, 한국 측 기록에서는 주로 한자를 그대로 읽어 종의지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임진왜란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 중 하나였으며 전쟁 도중과 이후에도 조선과 일본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다면적인 인물입니다. 1568년, 소 요시토시는 15대 쓰시마 당주 소 마사모리의 4남으로 태어납니다.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죠. 그러나 양자들이 계속 죽으면서 소 요시토시가 11살에 가문 제 20대 당주가 됩니다. 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당주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이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대마도의 영지를 인정받습니다. 1592년,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를 출...

아시가루에서 32만 석의 다이묘가 되는 엄청난 출세를 이룬, "토도 타카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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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도 타카토라  그는 전국시대부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입니다. 몇 번이고 주군을 바꾼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워낙 유명하고 스케일이 커서 가려지는 면이 있지만 토도 타카토라도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가루에서 다이묘가 되는 엄청난 출세를 이룹니다. 축성의 달인이기도 하여 생애 무려 20개의 성을 축성했다고 합니다. 1556년 정월 6일에 오우미국 이누카미군 토도무라에서 토도 겐스케 토라타카와 묘세이 부인(도라)의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1569년 키나이에 영향력을 뻗힌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나가마사 등을 동원해 이세로 진공하자, 형인 토도 겐시치로 타카노리가 나가마사를 따라 이세 공격에 참여합니다. 타카노리는 이번 전투에 선진을 맡아 오카와치 성을 공격했는데, 훌륭한 무위를 숙부 다가 신스케 요시마사와 함께 보여주었으나 전사하고 맙니다. 이렇게 형을 잃은 토도는 약 1년 뒤인 1570년에, 형과 똑같이 나가마사를 따랐죠. 동월 즈음 벌어진 아네가와 전투에도 참가해, 어린 나이에도 적의 수급을 하나 취하는 군공을 올립니다. 1582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야마자키 전투를 일으키자 여기에 따라 가 선봉으로서 공을 올립니다. 이후 타키가와 가문과의 전투에도 참여했고, 주군 히데나가는 하리마와 다지마의 2국을 가지는 한 명의 다이묘로 올라가는 것에 성공합니다. 히데나가는 곧 다지마에 입부했지만 마땅한 성곽이 없었기에 아리코야마 성 주변의 이즈시에 성을 하나 만들 것을 명령했는데, 타카토라도 이 명령을 받아 양성을 개축하는 것은 물론, 히메지와 이즈시에서의 통치도 맡게 됩니다. 1592년 타카토라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지만 이순신을 만나 그 동안의 명성과 달리 옥포해전 등에서 패배하고, 정유재란 때 원균을 상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하지만 다시 이순신과 명량해전, 절이도 해전 등에서 맞붙어 패배합니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과 싸웠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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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입니다. 이요국 오즈번 초대 번주이며 다쓰노번 와키자카씨의 시조이고, 이와지국 스모토번주이죠. 와키자카는 덴분 23년 오우미국 출신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장남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재혼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된 것이며 본래 이름은 다무라 진나이였죠.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지만, 1573년 아자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돼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웁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를 떠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 밑에서 히데요시의 쥬고쿠 평정전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았습니다. 주로 와키자카는 육전에서 다양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해적 집단이 주둔 중이던 영지를 받아 1585년 무렵부터 수군 지휘관을 담당합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까지 수군 담당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와키자카가 원래부터 수군 담당이라고 잘못 알고 있지요. 원래 해적 출신이던 구키 요시타카를 제외한 다이묘들 중에는 와키자카처럼 해적이 있는 영지의 다이묘가 되면서 전직하게 된 케이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군으로 참전해 육군을 따라 도성까지 진격했으며 도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경상, 충청, 전라 연합군 7~8만의 조선군을 공격해 패퇴시킵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떤 무인도에 고립돼 버렸는데 거기서 10일간 표류하며 섬에서 나는 미역을 먹으며 조선 수군이 수색을 포기하기만을 기다려야 했지요. 이후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나타난 구조선을 통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와키자카 가문은 지금까지도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7월 8일에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이 생겨났죠.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본래 ...

에도 막부의 창업 공신이자 도쿠가와 사천왕인, 이이 나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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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 나오마사 나오마사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입니다. 아명은 토라마츠이고요. 흔히 에도 막부의 창업 공시이자 도쿠가와 4천왕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에야스의 고참 가신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사실 생년을 보면 알겠지만 도쿠가와 가신단 중 다소 늦게 합류한 신진 가신이지요. 그는 토토우미국 이이노야에서 태어납니다. 이이 가문은 대대로 지방영주였고요. 이이노야는 위로는 다케다 신겐, 오른쪽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사이에 낀 지역입니다. 어느 쪽이든 가신이 돼 그 수하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죠. 이이 가문은 당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이마가와를 섬기게 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양할아버지 이이 나오모리는 1560년 오다 노부나가를 쳐들어갔던 오케하지마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당주를 이은 아버지 이이 나오치카는 세력을 불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다는 모반의 의심을 사서 나오마사가 태어난 다음해인 1562년 요시모토의 후계자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죽임을 당했죠. 이이 가문은 남성이라고는 이이 나오마사만 남게 됐고,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이자 한때는 약혼녀였던 지로호우시가 그의 양모가 되며 이름을 이이 나오토라로 개명하여 당시 어렸던 나오마사를 대신하여 당주 역할을 합니다. 나오마사는 8살까지 나오토라가 맡아 기르다, 미카와의 절에 맡겨져 15살 때까지 교육을 받습니다.  한편, 다케다 신겐이 죽고 다케다 세력이 약해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토우미 지역을 안정시킵니다. 이에, 나오토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절에 맡겼던 15살의 나오마사를 불러와서 157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 하였죠. 이에야스는 만치요라는 이름을 주고 자신의 시종으로 삼고, 영지를 선사했습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싸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빨간 갑옷이 특징인 특수부대인 이이 적비를 조직하고 여러 전쟁에서 도쿠가와 군의...

일본 전국시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 "구로다 간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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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다 간베에 구로다 간베에의 원래 이름은 아버지 모토타카가 지어준 구로다 요시타카입니다. 오늘날에는 구로다 간베에라는 통칭으로 더 유명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지요. 출가 후에는 조스이란 호를 사용하여 구로다 조스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죠. 그리고 한편으로 돈 시메온이란 세례명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로 타케나카 시게하루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병위라 불리지요. 하지만 시게하루가 먼저 병사했기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일한 시기는 없습니다. 시게하루 사후에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군사 전략과 다른 다이묘 등과의 교섭에서 활약하면서 도요토미의 천하를 성립시키는데 기여하였죠. 히데요시의 제갈량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대 일본 최고의 책략가로 이름을 떨칩니다. 구로다 간베에 생애 그의 아명은 만키치입니다. 고데라 가문의 중신이었던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가 당주 고데라 마사모토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고데라 성씨를 하사 받았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때문에 고데라 요시타카 혹은 고데라 간베에라 불리게 되죠. 장성한 후 고데라 마사모토의 또 다른 양녀인 쿠시하시 테루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구로다 간베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주 대리를 역임합니다. 성주 대리 당시 이웃한 아카마쓰 가가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데라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단 300명으로 이를 격파해 이름을 떨쳤죠. 이후 오다 가문이 주코쿠로 침공해 올 당시 약소 세력인 고데라 가문은 모리와 오다 중 어느 가문에 붙을지 고심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때까지 주코쿠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모리 가에 종속되는 것을 주장했으나 오직 간베에만이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와 오다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나가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간파했고 주군을 설득하여 마사모토는 오다 가문에 투항합니다. 1578년, 하리마의 거대한 세력인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

오대로의 한 사람이자, 에도시대 카가 번 마에다 씨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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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토시이에는 오와리 지방의 호족이었던 마에다 토시하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명은 이누치요이죠. 어려서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갔으며, 노부나가 휘하의 엘리트 부대인 아카호로슈 창설 멤버이자 필두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통칭 '창의 마타자'로 불릴 정도로 창의 명수로 이름을 날립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인 180cm의 키에 6m가 되는 장창을 들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다고 하며, 젊었을 때는 호쾌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요. 1559년, 노부나가가 보는 앞에서 쥬아미를 베어버리고 오다 가문에서 내쫓겼지만, 이후로 2년에 걸쳐 오케하자마 전투나 이나바 산성 공략 등에서 자기 혼자 마음대로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게 됩니다. 결국 2년 만에 오다 노부나가도 용서하면서 오다 가문으로 복귀하게 됐고 전공을 인정받아 오히려 봉급은 더욱더 늘어났습니다. 1574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일종의 파견무장)가 됩니다. 그 후에는 카츠이에를 따라서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후츄 3인중이라 불리며 다이묘가 됩니다. 노부나가가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계속 두지 않고 전투가 있는 곳으로 전지를 바꿔서 계속 파견했고, 1581년에 노토 1국을 가증 받아 영지 23만석의 쿠니모치가 되었죠. 그에 대한 평가 토시이에는 원래 거칠었던 성격도 나이가 들면서 온유해졌고 이 덕분에 많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토시이에를 좋아합니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의 신분이 낮았을 때부터 부부 단위로 교우를 가졌으며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로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친구로 지냈다고 하네요. 일본 천하를 통일한 이후 폭군이 된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의 간언만큼은 들어주었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며 말년에 히데요리를 맡긴 것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실력자가 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망이 모였는데, 히데요시 ...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며 고니시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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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오늘날 규슈의 구마모토현의 다이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라이벌 관계였지요. 가토 기요마사 생애 1562년 대장장이였던 가토 기요타다와 가지야 세이베에의 딸 이토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가토의 아명은 원래 야샤와카였는데, 야샤와카가 어릴 적 아버지 기요타다가 일찍 죽고 말지요. 가토는 1575년에 겐푸쿠를 마치기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겐푸쿠를 마치고 그 유명한 가토 도라노스케 기요마사라는 이름을 얻었죠. 이와 함께 170석의 영지를 하사받으며 인생의 첫 영지를 가지게 됩니다. 이후 시즈가타케의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3,000석의 영지를 받습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큰 공을 세웠던 무장 7인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부르죠. 평민 출신이라 후다이 가신이 없는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힘을 받아 가토는 승승장구 할 수 있었지요. 규슈 정벌 이후에는 히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 석의 다이묘로 우뚝 섭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임진왜란 가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선봉이 돼 조선으로 침략합니다. 개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고니시 군과 함께 하였고, 그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여 국경인, 국세필 등의 순왜들과 내통하여 선조의 서자인 임해군과 순화군도 사로잡았으며 가토는 이 공로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을 줍니다. 또 조선인 약 2,000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 노토 부락으로 군사를 보내 공격해서 성 하나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여진족이 기병을 보내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두만강을 넘어 다시 조선으로 철수합니다. 당시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에게 패했으며 함경도의 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000명에 이르는...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이자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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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겐신은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입니다. 에치고의 용이라는 별명이 있지요. 센고쿠 시대 전국 3영걸이라 불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장입니다. 가이의 호랑이였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의 용이라는 겐신은 용호상박이란 고사성어에 걸맞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합니다. 다케다 신겐과의 라이벌 구도 외에도 동국의 군신, 서국의 뇌신이라며 타치바나 도세츠와 함께 불리기도 하며, 생전부터 군신이라 불렸죠. 그로 인해 최고의 다이묘나 지휘관들도 겐신과 직접 조우하여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그 필생의 숙적은 호조 우지야스로 간토 평정을 위해 수차례 침공했으나 매번 이마가와, 다케다, 호조의 삼국동맹에 의한 단체행동으로 무산돼 끝내는 이루지 못하였지요. 우에스기 겐신 생애 겐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타메카게는 본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씨의 일족인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씨의 대리 가문인 에치고 나가오 가문인데, 상관인 에치고 슈고를 공격하고 에치고를 장악했습니다. 아버지 타메카게가 환갑 정도 되어서 겐신을 얻었는데, 이미 20세가 넘은 장남 하루카게가 있었기 때문에 겐신은 날 때부터 무시를 당했지요. 겐신은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어릴 때부터 절에서 자랐는데, 이때 출가했던 절이 금녀의 지역입니다. 이때의 교육이 그에겐 큰 자산이 되었는데 시, 서화, 유학과 예절 등을 익혀 당시 흔하지 않게 글과 교양을 갖춘 무사가 됩니다. 후에 겐신은 카마쿠라에서 노리마사의 양자가 돼 우에스기 성과 간토 간레이직을 받았으며 노리마사로부터 이름 한 자를 받아 마사토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지요. 겐신은 신겐과 라이벌인데,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천과 지에서 잘 나옵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모습을 숭배하는 우에스기 겐신과 극단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다케다 신겐과 이상과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아서 서로 경멸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능력 전쟁에 능한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로 ...

시마즈 4형제 중 둘째이며, 시마즈 퇴각으로 유명한 '시마즈 요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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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입니다. 시마즈 4형제 중 둘째로, 사츠마 시마즈가 17대 당주이기도 하죠. 임진왜란 당시 사천성 전투에서 7,000~10,000명의 병력으로 약 40,000명의 조명군을 격퇴한 뒤, 명군에서 '귀석만자'라고 부르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소문이 당대 일본에서 퍼졌다고 합니다. 1598년 11월 18일 새벽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이순신을 전사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대패하지요.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의 퇴각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생애 요시히로의 원래 이름은 타다히라였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을 받아 요시타카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요시히로로 바꿨다고 합니다. 시마즈 가문은 규슈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오토모 소린은 혼슈를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1587년, 시마즈 가문은 오오토모 가문의 원군 요청을 받고 규슈에 당도한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과 싸웠으나 병력이 열세라 패배했고, 규슈 통일전쟁에서 얻었던 땅들을 거의 다 빼앗기고 규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습니다. 이후 장남인 요시히사가 책임을 지고 은퇴하였으므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서 가독을 상속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히데요시의 1만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합니다. 당시 일본 원정군의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동원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10일간의 혈투 끝에 성을 함락시킵니다. 1597년엔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수군과 제휴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합니다. 8월에 남원 전투에 참가하고 부여까지 북상했으며 정읍을 지나 해남에 남하합니다. 10월 말부터 사천을 수비합니다. 이렇게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주요 전투에서 모두 활약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와 세키...

카이의 호랑이라 불린 전국시대 명장 '다케다 신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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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다 신겐 다케다 신겐은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이자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던 센고쿠 시대에도 손꼽히던 명장입니다. 통칭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렸죠. 우에스기 겐신과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며, 손자병법에서 따온 풍림화산의 깃발을 들고 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명은 다케다 다로이며, 성인이 돼 당시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이름을 받아 다케다 하루노부가 됩니다. 훗날 불자가 되면서 법명을 신겐으로 하게 돼, 다케다 신겐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다케다 신겐 생애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와 가독 승계 문제로 다투던 끝에 손을 써서 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무혈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은 뒤, 아버지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보내버린 후 젊은 나이에 카이의 다이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케다 가문이 터 잡은 카이, 시나노 지방은 산이 많아 농업도 불리하고 바다도 없어 교역하기도 좋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마 산지라서 군마가 풍부해, 기병 활용에 유리하다는 거대한 군사적 잠재력을 갖춘 지역이었죠. 물론 이 시대 일본 말은 땅딸막한 조랑말 수준이고 충격기병으로 활용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경사진 산야에서 자라 다리가 튼튼한 카이 말들은 인간의 두 다리보다 훨씬 빠른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고, 인간이 들기 힘든 무거운 짐도 나를 수 있으므로 아시가루 위주로 굴리는 적들보다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가독을 물려받은 이후 카이의 내외부를 평정하고 북부의 시나노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스와, 운노 등 강력한 지방 호족들을 격파하고 카이, 시나노에 걸쳐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후의 장애물이었던 북시나노의 호족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나름대로 강하게 저항해서 1548년에는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신겐에게 패배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다케다 신겐, 교토를 노리다. 다케다 신겐은 형식상 동맹을 유지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우호적인 서찰을 보내가며 그 대신 도쿠가와...

임진왜란 선봉장으로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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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니시 가문의 문장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입니다. 기독교도(기리시탄) 다이묘 중 하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이라고 잘 알려져 있지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매우 유명한 인물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생애 그는 사카이의 상인 고니시 류시의 아들이자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합니다.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합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를 정벌하기 위해 미키 성을 치던 중 사자로 히데요시를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죠. 히데요시 밑에선 후나부교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처음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입니다. 처음 다이묘가 될 때 하사받은 땅은 시코쿠 근처의 쇼도섬이라는 작은 섬이었죠. 이후에는 지금의 규슈 구마모토현에 있는 우토를 하사 받아 그곳의 다이묘가 됩니다. 고니시가 상인 시절에는 약종상으로 활동했습니다. (약종상 = 주로 약재를 취급하는 상인) 한편, 고니시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하네요.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됩니다. 고니시와 임진왜란 임진왜란 이전에 고니시는 대마도주인 사위 소 요시토시의 신변과 관련된 무역 문제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침략을 반대하던 쪽에 서있는 인물이었죠. 실제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

센고쿠 시대를 최종적으로 통일시킨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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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자 일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센고쿠 시대를 최종적으로 통일시킨 천하인입니다. 센고쿠 시대 미카와 지역의 영주였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안에 들어가는 등의 일을 거치며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나갔죠. 오다 사후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전국시대를 종식시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을 일으킬 때 조용히 몸을 사리며 세력을 기르다가 그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세력들을 상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뒤 일본의 새로운 통치지가 됩니다. 지금 일본의 수도 도쿄인 에도를 개척하여 에도 막부를 만들어 에도 시대를 연 인물이죠. 한편,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생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 마츠다이라 가문이라 '마츠다이라' 성을 사용했습니다. 기반이 되는 지역은 미카와국 오카자키이죠. 아명은 타케치요입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원래 오다와 이마가와 사이에 낀 약소한 세력이었으며, 미카와를 다스리는 것은 마츠다이라 가문보다는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이였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가, 후에 이미가와 가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이에야스로 개명합니다. 타케치요 시절에 동쪽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가던 중에 새 외가인 도다 일족이 일행을 오다 가에 팔아 넘겨 오다의 인질이 되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네요. 이 사건 덕분에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 관계를 갖게 됩니다. 감정 조절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생애 중반까지 엄청나게 굴욕을 많이 당합니다. 다케다 신겐과의 전투에서 바지에 똥을 쌀 정도로 극에 달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붙어 이겨놓고도 명분이 서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가는 등 생각보다 치욕을 많이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걱...

후호조씨 당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 '호조 우지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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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 우지야스 호조 우지야스는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입니다. 호조 우지쓰나의 아들이며, 후호조씨 3대째인 우지야스는 후호조씨 당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호조 우지야스 생애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아봅시다. 호조 우지야스는 전국시대 제일의 민생가로 유명합니다. 화폐 통일, 탄력적인 조세 정책, 관료 제도 개혁 등 제도적으로 앞서갔고, 일본 최초의 상수도망 구축, 지역 문화 개발을 위한 직공, 문화인 초빙 등 민중의 생활에도 큰 관심을 가진 군주였죠.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동으로 전봉된 뒤, 이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우지야스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 등을 수비전에서 물리치곤 하여 왠지 수성의 명군(성을 지키는 최고의 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후호조 씨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시기가 바로 우지야스 시절입니다. 1546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의 수장 노리마사, 오기가야츠 우에스기의 수장 토모사다, 코가 쿠보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관동 연합군 8만을 8000명의 병력으로 무찌른 '가와고에 성 전투'는 일본 3대 기습 중 하나로 일컬어집니다. 이 승리로 토모사다를 죽여 오기가야츠 가문을 멸망시켰고, 야마노우치 가문과 코가 쿠보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호조 가문을 관동의 패자로 만들었지요. 호조 우지야스의 활약이 대단했네요. 그러나 우지야스는 전국 시대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군임에도, 주위의 다이묘들이 너무 강해서 인지도 면에서 밀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호조 우지야스는 어릴 적에는 굉장히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별것 아닌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서 주위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16세가 되던 1531년에 처음으로 출진하여 대승을 거두고, 우에스기나 코가쿠보 아시카가, 사토미 등의 주위 세력과의 싸움에서 공을 쌓아나갑니다. 우지야스가 당주가 되었을 무렵에는 점점 세력을 신장하는 '굴러온 돌' 호조가에 대하여 관동 다이묘들의 감정이 나쁠 때였습...

일찍 태어났다면 천하를 평정했을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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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테 마사무네 다테 마사무네는 일본 전국시대와 도쿠가와 막부 때의 무장이며, 데와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입니다. 오슈 후지와라의 후예로 다테 가문 17대 당주였으며, 당주가 되고 불과 5년만에 오슈 최대의 다이묘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주에 오른 시기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미 일본을 거의 통일한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한 시절이였죠. 그러나 일본 현지에서도 마사무네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다테 마사무네 생애 그는 5살 때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다테 마사무네는 독안룡(하나의 눈만 있는 용)이 별명입니다. 그 몰골이 추하다고 하여 친모와 동생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살해 위협까지 받아야 했답니다. 그 때문에 하나 뿐인 눈은 다테 마사무네 평생의 트라우마가 됐죠. 이에 대한 컴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반드시 두 눈을 모두 멀쩡하게 그리도록 지시했다고 하네요. 전술가로서 다테 마사무네 외눈인 탓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지만, 대부분의 굵직한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크게 밀리는 등 전쟁 쪽으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약소 가문인 오사키 가문을 상대로도 패배하고, 비슷한 전력인 사타케나 모가미를 상대로는 가문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었죠.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동군이었던 다테 군은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바로 패배하였고, 결국 마사무네는 도망가는 기병들 틈에 섞여 우에스기 군의 공격을 몇 차례나 받아야 했습니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전초전부터 양측 주력 부대가 갑작스럽게 조우하는 예상 외의 일이 발생했는데, 사나다 ...

밑바닥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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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시간에는 일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개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노부나가 사후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천하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에 실패해 자신의 사후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기기도 합니다. 히데요시의 대단한 점은,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까지 오른 것이다. 그 시대에 대부분의 출세한 사람들은 다이묘로서 거대한 가문 출신입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등도 모두 다이묘로서 귀족 가문 출신이죠. 한국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침략자로 생각합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아 당연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요. 거꾸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엄청난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등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입니다. 유년기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에서 아시가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아요. 시절이 시절인지라 그의 출생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를 섬기며 그에게 병법, 무예, 학문 등을 배웠으나 얼마 안 가 그만두고, 18세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됩니다.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수행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하네요.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합니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뭔가 살 게 있어서 가신들에게 시키면 엉망인 것만 잔뜩 가...

사실상 천하를 통일했던 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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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일본사를 하나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교훈적인 내용도 있고, 꽤 재밌는 사건도 많으니 볼 수록 흥미진진할 겁니다.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입니다. 다이묘라 함은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를 뜻합니다. 그는 기존의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키고 센고쿠 시대의 양상을 완전히 변화시켰기 때문에 매우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중간에 서 있었던 사람이며, 일본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혼노지의 변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기도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가족관계 이 시대에 가족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의 호랑이라 불리던 영웅이었지만 말년에는 사이토 도산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이에 껴서 곤란한 처지가 됩니다. 아버지는 오다 노부나가를 신뢰하여 그에게 가독을 물려줍니다.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의 라이벌인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오다 노부나가는 정략결혼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다고 하네요. 오다 노부나가는 측실인 이코마 키츠노를 가장 사랑했다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평가 그는 일본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며, 현대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고, 센코쿠 시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수많은 매체에 등장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센고쿠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전형적인 그 시대의 센고쿠 다이묘였기 때문입니다.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 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룹니다.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천하인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보니 그의 능력은 대단히 특별하다고 생각됩니다. 노부나가의 성격이 급하고 잔혹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의 전략 및 전술은 매우 신중한 편이죠. 하지만 노부나가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당대 최고로 보기는 어렵지요. 그보다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을 더 높게 보는 경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