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번 시간에는 일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개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노부나가 사후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천하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에 실패해 자신의 사후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기기도 합니다.


히데요시의 대단한 점은, 서민 출신으로 태어나서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까지 오른 것이다. 그 시대에 대부분의 출세한 사람들은 다이묘로서 거대한 가문 출신입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등도 모두 다이묘로서 귀족 가문 출신이죠.

한국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침략자로 생각합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아 당연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요. 거꾸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엄청난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등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입니다.


유년기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에서 아시가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아요. 시절이 시절인지라 그의 출생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데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를 섬기며 그에게 병법, 무예, 학문 등을 배웠으나 얼마 안 가 그만두고, 18세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됩니다.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수행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하네요.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합니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뭔가 살 게 있어서 가신들에게 시키면 엉망인 것만 잔뜩 가져오는데 히데요시는 다른 가신들이 가져온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물건을 가져왔지요.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가 그를 중용했다고 합니다.


천하인이 되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모시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암살을 당하자 황급히 교토로 향합니다.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열된 오다 가문을 진압하고,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죠. 히데요시가 쇼군이 아닌 관백을 칭한 이유는, 평민 가문에서 벼락출세한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가문으로 막부를 열어 정이대장군이 되는 대신 관백에 직접 취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침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합니다. 마침내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하는 것으로 임진왜란은 시작됩니다.

조선 쪽에서도 전쟁에 대비해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규모를 오판한 데다 전쟁 경험이 없고 기강이 해이해진 상황이라 개전 초기에는 동래성, 경주성, 영천성 등 경상도 지역의 모든 성읍들을 잃고, 전쟁에서 깨지게 됩니다.

일본 측의 압도적인 무력에 조선이 연패를 거듭하여 평양 또는 함경도까지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진격하는 과정에서 주 진격로에 있는 성읍들만 점령한지라 조선군이 다시 재반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보급선이 길어지기 시작했죠.

그 때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대활약과 각지에서 의병 등을 흡수하며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군의 전방위적 반격이 개시됩니다. 여기에 명나라의 원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이 확실히 불리해졌죠. 그리고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 협상을 시작합니다.


엇갈린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일본의 대표적인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돼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을 보냄으로써 국면을 해결하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무리한 요구조건을 제시합니다.


명나라의 요구조건

1. 일본은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날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VS


일본의 요구조건

1.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2.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3.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6.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7.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고 임진왜란은 끝납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유명한 사세구가 있습니다. 한 번 보시죠.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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