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과 싸웠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입니다. 이요국 오즈번 초대 번주이며 다쓰노번 와키자카씨의 시조이고, 이와지국 스모토번주이죠.

와키자카는 덴분 23년 오우미국 출신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장남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재혼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된 것이며 본래 이름은 다무라 진나이였죠.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지만, 1573년 아자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돼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웁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를 떠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 밑에서 히데요시의 쥬고쿠 평정전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았습니다. 주로 와키자카는 육전에서 다양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해적 집단이 주둔 중이던 영지를 받아 1585년 무렵부터 수군 지휘관을 담당합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까지 수군 담당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와키자카가 원래부터 수군 담당이라고 잘못 알고 있지요. 원래 해적 출신이던 구키 요시타카를 제외한 다이묘들 중에는 와키자카처럼 해적이 있는 영지의 다이묘가 되면서 전직하게 된 케이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군으로 참전해 육군을 따라 도성까지 진격했으며 도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경상, 충청, 전라 연합군 7~8만의 조선군을 공격해 패퇴시킵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떤 무인도에 고립돼 버렸는데 거기서 10일간 표류하며 섬에서 나는 미역을 먹으며 조선 수군이 수색을 포기하기만을 기다려야 했지요. 이후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나타난 구조선을 통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와키자카 가문은 지금까지도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7월 8일에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이 생겨났죠.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본래 서군이었으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세키가하라 도중에 배신,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패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도쿠가와의 동군으로 이적한 후 1609년 원래 본거지였던 아와지 스모토 번 대신 시코쿠의 이요 오즈 번 5만 3천석을 새 영지로 받습니다. 60세가 되던 1614년에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차남이자 적자인 와키자카 야스모토를 대신 보냅니다. 이듬해인 1615년 야스모토에게 가문을 물려준 뒤, 교토로 떠나 은거 생활을 했으며, 1626년 음력 8월 6일 교토의 자택에서 72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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