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 "구로다 간베에"

 


구로다 간베에

구로다 간베에의 원래 이름은 아버지 모토타카가 지어준 구로다 요시타카입니다. 오늘날에는 구로다 간베에라는 통칭으로 더 유명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지요.

출가 후에는 조스이란 호를 사용하여 구로다 조스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죠. 그리고 한편으로 돈 시메온이란 세례명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로 타케나카 시게하루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병위라 불리지요. 하지만 시게하루가 먼저 병사했기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일한 시기는 없습니다. 시게하루 사후에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군사 전략과 다른 다이묘 등과의 교섭에서 활약하면서 도요토미의 천하를 성립시키는데 기여하였죠. 히데요시의 제갈량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대 일본 최고의 책략가로 이름을 떨칩니다.



구로다 간베에 생애

그의 아명은 만키치입니다. 고데라 가문의 중신이었던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가 당주 고데라 마사모토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고데라 성씨를 하사 받았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때문에 고데라 요시타카 혹은 고데라 간베에라 불리게 되죠. 장성한 후 고데라 마사모토의 또 다른 양녀인 쿠시하시 테루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구로다 간베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주 대리를 역임합니다. 성주 대리 당시 이웃한 아카마쓰 가가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데라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단 300명으로 이를 격파해 이름을 떨쳤죠.

이후 오다 가문이 주코쿠로 침공해 올 당시 약소 세력인 고데라 가문은 모리와 오다 중 어느 가문에 붙을지 고심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때까지 주코쿠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모리 가에 종속되는 것을 주장했으나 오직 간베에만이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와 오다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나가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간파했고 주군을 설득하여 마사모토는 오다 가문에 투항합니다.


1578년, 하리마의 거대한 세력인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위의 여러 세력도 크게 동요합니다. 고데라 마사모토도 이에 호응하여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주코쿠 원정군에게 패배했죠. 이때 구로다 간베에를 높게 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기 위해서는 모반자의 성씨를 계속 쓰는 건 좋지 않다 조언하여 이에 간베에는 본래의 성씨인 구로다로 돌아갑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모리 군과 대치 상태였던 당시 히데요시는 심히 당황합니다. 눈앞에는 당장 그때까지 공격하던 모리군이 있는 데다 한편으로는 재빨리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지 않으면 다른 경쟁자들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큰 소리를 칠 것이 뻔한 상황이지요.

이 때 구로다 간베에는 히데요시에게 지금이 천하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고 부추기며, 미츠히데를 즉각 끌어내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우뚝 설 기회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였고, 간베에 본인은 모리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 교섭에도 직접 나서 주도적으로 세력간의 경계를 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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