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로의 한 사람이자, 에도시대 카가 번 마에다 씨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토시이에는 오와리 지방의 호족이었던 마에다 토시하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명은 이누치요이죠. 어려서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갔으며, 노부나가 휘하의 엘리트 부대인 아카호로슈 창설 멤버이자 필두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통칭 '창의 마타자'로 불릴 정도로 창의 명수로 이름을 날립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인 180cm의 키에 6m가 되는 장창을 들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다고 하며, 젊었을 때는 호쾌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요. 1559년, 노부나가가 보는 앞에서 쥬아미를 베어버리고 오다 가문에서 내쫓겼지만, 이후로 2년에 걸쳐 오케하자마 전투나 이나바 산성 공략 등에서 자기 혼자 마음대로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게 됩니다. 결국 2년 만에 오다 노부나가도 용서하면서 오다 가문으로 복귀하게 됐고 전공을 인정받아 오히려 봉급은 더욱더 늘어났습니다.
1574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일종의 파견무장)가 됩니다. 그 후에는 카츠이에를 따라서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후츄 3인중이라 불리며 다이묘가 됩니다. 노부나가가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계속 두지 않고 전투가 있는 곳으로 전지를 바꿔서 계속 파견했고, 1581년에 노토 1국을 가증 받아 영지 23만석의 쿠니모치가 되었죠.
그에 대한 평가
토시이에는 원래 거칠었던 성격도 나이가 들면서 온유해졌고 이 덕분에 많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토시이에를 좋아합니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의 신분이 낮았을 때부터 부부 단위로 교우를 가졌으며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로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친구로 지냈다고 하네요. 일본 천하를 통일한 이후 폭군이 된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의 간언만큼은 들어주었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며 말년에 히데요리를 맡긴 것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실력자가 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망이 모였는데, 히데요시 사후 둘로 갈라진 무단파와 문치파 모두 토시이에의 말만큼은 거스르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전일본 중에서 유일하게 양자의 중재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이었죠. 이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야심이 있었으면 일본을 가질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도 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야 직접적인 행동에 옮겼지요.
여담
중년이 넘어선 이후에는 학문에도 관심을 갖게 돼 가토 기요마사 등 후배 무장들에게 영주로서 학문을 익히도록 권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에다의 출신지는 오늘날의 아이치현에 해당하는 오와리지만 오늘날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도 많이 사랑받는 무장인데, 마에다가 이 지역의 영주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카가라고 불렸는데 토시이에가 주인공인 NHK 대하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의 부제도 '카가 100만석 이야기'이지요. 또한 카가번의 마에다 가문이 거성으로 삼았던 성이 카가에 있는 가나자와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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