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며 고니시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오늘날 규슈의 구마모토현의 다이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라이벌 관계였지요.
가토 기요마사 생애
1562년 대장장이였던 가토 기요타다와 가지야 세이베에의 딸 이토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가토의 아명은 원래 야샤와카였는데, 야샤와카가 어릴 적 아버지 기요타다가 일찍 죽고 말지요.
가토는 1575년에 겐푸쿠를 마치기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겐푸쿠를 마치고 그 유명한 가토 도라노스케 기요마사라는 이름을 얻었죠. 이와 함께 170석의 영지를 하사받으며 인생의 첫 영지를 가지게 됩니다.
이후 시즈가타케의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3,000석의 영지를 받습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큰 공을 세웠던 무장 7인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부르죠. 평민 출신이라 후다이 가신이 없는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힘을 받아 가토는 승승장구 할 수 있었지요. 규슈 정벌 이후에는 히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 석의 다이묘로 우뚝 섭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임진왜란
가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선봉이 돼 조선으로 침략합니다. 개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고니시 군과 함께 하였고, 그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여 국경인, 국세필 등의 순왜들과 내통하여 선조의 서자인 임해군과 순화군도 사로잡았으며 가토는 이 공로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을 줍니다.
또 조선인 약 2,000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 노토 부락으로 군사를 보내 공격해서 성 하나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여진족이 기병을 보내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두만강을 넘어 다시 조선으로 철수합니다. 당시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에게 패했으며 함경도의 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000명에 이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명나라의 참전까지 겹쳐지며 퇴각하게 됩니다.
오사카 전투 이후 가문의 몰락
오사카 전투 이후 에도 막부가 천하를 움켜진 후에는, 서서히 몰락합니다. 에도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토 기요마사는 여전히 전 주군인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이었고, 도쿠가와 가문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죠.
아들 가토 타다히로는 1632년 막부 주도하의 2차 개역 작업에 휘말려 영지를 몰수당합니다. 그래도 가토의 자손들은 더 이상 숙청당하지 않은 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도 일본에 생존해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이야기
가토는 입이 매우 커서 주먹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항왜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는 조선 정부의 판단으로 흐지부지 되었죠.
말년에는 글을 익혔는지 논어를 붉은 먹을 묻힌 붓으로 밑줄을 쳐가며 읽었다고 하네요. 하루는 기르던 원숭이가 자신의 논어에 붓으로 낙서하는 것을 보고 "너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거냐"라며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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