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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의 창업 공신이자 도쿠가와 사천왕인, 이이 나오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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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 나오마사 나오마사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입니다. 아명은 토라마츠이고요. 흔히 에도 막부의 창업 공시이자 도쿠가와 4천왕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에야스의 고참 가신이라는 인상이 있지만, 사실 생년을 보면 알겠지만 도쿠가와 가신단 중 다소 늦게 합류한 신진 가신이지요. 그는 토토우미국 이이노야에서 태어납니다. 이이 가문은 대대로 지방영주였고요. 이이노야는 위로는 다케다 신겐, 오른쪽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 사이에 낀 지역입니다. 어느 쪽이든 가신이 돼 그 수하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죠. 이이 가문은 당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이마가와를 섬기게 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신이었던 양할아버지 이이 나오모리는 1560년 오다 노부나가를 쳐들어갔던 오케하지마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당주를 이은 아버지 이이 나오치카는 세력을 불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다는 모반의 의심을 사서 나오마사가 태어난 다음해인 1562년 요시모토의 후계자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죽임을 당했죠. 이이 가문은 남성이라고는 이이 나오마사만 남게 됐고,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이자 한때는 약혼녀였던 지로호우시가 그의 양모가 되며 이름을 이이 나오토라로 개명하여 당시 어렸던 나오마사를 대신하여 당주 역할을 합니다. 나오마사는 8살까지 나오토라가 맡아 기르다, 미카와의 절에 맡겨져 15살 때까지 교육을 받습니다.  한편, 다케다 신겐이 죽고 다케다 세력이 약해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토토우미 지역을 안정시킵니다. 이에, 나오토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절에 맡겼던 15살의 나오마사를 불러와서 157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게 하였죠. 이에야스는 만치요라는 이름을 주고 자신의 시종으로 삼고, 영지를 선사했습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싸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빨간 갑옷이 특징인 특수부대인 이이 적비를 조직하고 여러 전쟁에서 도쿠가와 군의...

일본 전국시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 "구로다 간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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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다 간베에 구로다 간베에의 원래 이름은 아버지 모토타카가 지어준 구로다 요시타카입니다. 오늘날에는 구로다 간베에라는 통칭으로 더 유명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지요. 출가 후에는 조스이란 호를 사용하여 구로다 조스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죠. 그리고 한편으로 돈 시메온이란 세례명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지략을 가진 책사로 타케나카 시게하루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병위라 불리지요. 하지만 시게하루가 먼저 병사했기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일한 시기는 없습니다. 시게하루 사후에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군사 전략과 다른 다이묘 등과의 교섭에서 활약하면서 도요토미의 천하를 성립시키는데 기여하였죠. 히데요시의 제갈량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대 일본 최고의 책략가로 이름을 떨칩니다. 구로다 간베에 생애 그의 아명은 만키치입니다. 고데라 가문의 중신이었던 아버지 구로다 모토타카가 당주 고데라 마사모토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고데라 성씨를 하사 받았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때문에 고데라 요시타카 혹은 고데라 간베에라 불리게 되죠. 장성한 후 고데라 마사모토의 또 다른 양녀인 쿠시하시 테루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구로다 간베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주 대리를 역임합니다. 성주 대리 당시 이웃한 아카마쓰 가가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데라 가문의 본성인 히메지 성을 침공하자 단 300명으로 이를 격파해 이름을 떨쳤죠. 이후 오다 가문이 주코쿠로 침공해 올 당시 약소 세력인 고데라 가문은 모리와 오다 중 어느 가문에 붙을지 고심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때까지 주코쿠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모리 가에 종속되는 것을 주장했으나 오직 간베에만이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와 오다 가문의 당주 오다 노부나가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간파했고 주군을 설득하여 마사모토는 오다 가문에 투항합니다. 1578년, 하리마의 거대한 세력인 미키 성주 벳쇼 나가하루가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들자 주...

오대로의 한 사람이자, 에도시대 카가 번 마에다 씨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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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토시이에는 오와리 지방의 호족이었던 마에다 토시하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아명은 이누치요이죠. 어려서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갔으며, 노부나가 휘하의 엘리트 부대인 아카호로슈 창설 멤버이자 필두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통칭 '창의 마타자'로 불릴 정도로 창의 명수로 이름을 날립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인 180cm의 키에 6m가 되는 장창을 들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다고 하며, 젊었을 때는 호쾌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요. 1559년, 노부나가가 보는 앞에서 쥬아미를 베어버리고 오다 가문에서 내쫓겼지만, 이후로 2년에 걸쳐 오케하자마 전투나 이나바 산성 공략 등에서 자기 혼자 마음대로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게 됩니다. 결국 2년 만에 오다 노부나가도 용서하면서 오다 가문으로 복귀하게 됐고 전공을 인정받아 오히려 봉급은 더욱더 늘어났습니다. 1574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일종의 파견무장)가 됩니다. 그 후에는 카츠이에를 따라서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후츄 3인중이라 불리며 다이묘가 됩니다. 노부나가가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계속 두지 않고 전투가 있는 곳으로 전지를 바꿔서 계속 파견했고, 1581년에 노토 1국을 가증 받아 영지 23만석의 쿠니모치가 되었죠. 그에 대한 평가 토시이에는 원래 거칠었던 성격도 나이가 들면서 온유해졌고 이 덕분에 많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토시이에를 좋아합니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의 신분이 낮았을 때부터 부부 단위로 교우를 가졌으며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로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친구로 지냈다고 하네요. 일본 천하를 통일한 이후 폭군이 된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의 간언만큼은 들어주었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며 말년에 히데요리를 맡긴 것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실력자가 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망이 모였는데, 히데요시 ...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며 고니시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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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오늘날 규슈의 구마모토현의 다이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라이벌 관계였지요. 가토 기요마사 생애 1562년 대장장이였던 가토 기요타다와 가지야 세이베에의 딸 이토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가토의 아명은 원래 야샤와카였는데, 야샤와카가 어릴 적 아버지 기요타다가 일찍 죽고 말지요. 가토는 1575년에 겐푸쿠를 마치기 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겐푸쿠를 마치고 그 유명한 가토 도라노스케 기요마사라는 이름을 얻었죠. 이와 함께 170석의 영지를 하사받으며 인생의 첫 영지를 가지게 됩니다. 이후 시즈가타케의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3,000석의 영지를 받습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큰 공을 세웠던 무장 7인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부르죠. 평민 출신이라 후다이 가신이 없는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힘을 받아 가토는 승승장구 할 수 있었지요. 규슈 정벌 이후에는 히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 석의 다이묘로 우뚝 섭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임진왜란 가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선봉이 돼 조선으로 침략합니다. 개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고니시 군과 함께 하였고, 그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여 국경인, 국세필 등의 순왜들과 내통하여 선조의 서자인 임해군과 순화군도 사로잡았으며 가토는 이 공로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을 줍니다. 또 조선인 약 2,000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 노토 부락으로 군사를 보내 공격해서 성 하나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여진족이 기병을 보내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두만강을 넘어 다시 조선으로 철수합니다. 당시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찰을 보면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에게 패했으며 함경도의 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000명에 이르는...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이자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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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겐신은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입니다. 에치고의 용이라는 별명이 있지요. 센고쿠 시대 전국 3영걸이라 불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장입니다. 가이의 호랑이였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의 용이라는 겐신은 용호상박이란 고사성어에 걸맞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합니다. 다케다 신겐과의 라이벌 구도 외에도 동국의 군신, 서국의 뇌신이라며 타치바나 도세츠와 함께 불리기도 하며, 생전부터 군신이라 불렸죠. 그로 인해 최고의 다이묘나 지휘관들도 겐신과 직접 조우하여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그 필생의 숙적은 호조 우지야스로 간토 평정을 위해 수차례 침공했으나 매번 이마가와, 다케다, 호조의 삼국동맹에 의한 단체행동으로 무산돼 끝내는 이루지 못하였지요. 우에스기 겐신 생애 겐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타메카게는 본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씨의 일족인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씨의 대리 가문인 에치고 나가오 가문인데, 상관인 에치고 슈고를 공격하고 에치고를 장악했습니다. 아버지 타메카게가 환갑 정도 되어서 겐신을 얻었는데, 이미 20세가 넘은 장남 하루카게가 있었기 때문에 겐신은 날 때부터 무시를 당했지요. 겐신은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어릴 때부터 절에서 자랐는데, 이때 출가했던 절이 금녀의 지역입니다. 이때의 교육이 그에겐 큰 자산이 되었는데 시, 서화, 유학과 예절 등을 익혀 당시 흔하지 않게 글과 교양을 갖춘 무사가 됩니다. 후에 겐신은 카마쿠라에서 노리마사의 양자가 돼 우에스기 성과 간토 간레이직을 받았으며 노리마사로부터 이름 한 자를 받아 마사토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지요. 겐신은 신겐과 라이벌인데,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천과 지에서 잘 나옵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모습을 숭배하는 우에스기 겐신과 극단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다케다 신겐과 이상과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아서 서로 경멸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능력 전쟁에 능한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로 ...

시마즈 4형제 중 둘째이며, 시마즈 퇴각으로 유명한 '시마즈 요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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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입니다. 시마즈 4형제 중 둘째로, 사츠마 시마즈가 17대 당주이기도 하죠. 임진왜란 당시 사천성 전투에서 7,000~10,000명의 병력으로 약 40,000명의 조명군을 격퇴한 뒤, 명군에서 '귀석만자'라고 부르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소문이 당대 일본에서 퍼졌다고 합니다. 1598년 11월 18일 새벽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이순신을 전사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대패하지요.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의 퇴각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생애 요시히로의 원래 이름은 타다히라였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을 받아 요시타카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요시히로로 바꿨다고 합니다. 시마즈 가문은 규슈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오토모 소린은 혼슈를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1587년, 시마즈 가문은 오오토모 가문의 원군 요청을 받고 규슈에 당도한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과 싸웠으나 병력이 열세라 패배했고, 규슈 통일전쟁에서 얻었던 땅들을 거의 다 빼앗기고 규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습니다. 이후 장남인 요시히사가 책임을 지고 은퇴하였으므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서 가독을 상속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히데요시의 1만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합니다. 당시 일본 원정군의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동원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10일간의 혈투 끝에 성을 함락시킵니다. 1597년엔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수군과 제휴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합니다. 8월에 남원 전투에 참가하고 부여까지 북상했으며 정읍을 지나 해남에 남하합니다. 10월 말부터 사천을 수비합니다. 이렇게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주요 전투에서 모두 활약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와 세키...

카이의 호랑이라 불린 전국시대 명장 '다케다 신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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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다 신겐 다케다 신겐은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이자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던 센고쿠 시대에도 손꼽히던 명장입니다. 통칭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렸죠. 우에스기 겐신과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며, 손자병법에서 따온 풍림화산의 깃발을 들고 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명은 다케다 다로이며, 성인이 돼 당시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이름을 받아 다케다 하루노부가 됩니다. 훗날 불자가 되면서 법명을 신겐으로 하게 돼, 다케다 신겐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다케다 신겐 생애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와 가독 승계 문제로 다투던 끝에 손을 써서 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무혈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은 뒤, 아버지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보내버린 후 젊은 나이에 카이의 다이묘 자리에 올랐습니다. 다케다 가문이 터 잡은 카이, 시나노 지방은 산이 많아 농업도 불리하고 바다도 없어 교역하기도 좋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마 산지라서 군마가 풍부해, 기병 활용에 유리하다는 거대한 군사적 잠재력을 갖춘 지역이었죠. 물론 이 시대 일본 말은 땅딸막한 조랑말 수준이고 충격기병으로 활용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경사진 산야에서 자라 다리가 튼튼한 카이 말들은 인간의 두 다리보다 훨씬 빠른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고, 인간이 들기 힘든 무거운 짐도 나를 수 있으므로 아시가루 위주로 굴리는 적들보다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가독을 물려받은 이후 카이의 내외부를 평정하고 북부의 시나노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스와, 운노 등 강력한 지방 호족들을 격파하고 카이, 시나노에 걸쳐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후의 장애물이었던 북시나노의 호족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나름대로 강하게 저항해서 1548년에는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신겐에게 패배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다케다 신겐, 교토를 노리다. 다케다 신겐은 형식상 동맹을 유지하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우호적인 서찰을 보내가며 그 대신 도쿠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