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일 그리고 고금 독보의 용사이며,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린 "혼다 타다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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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다 타다카츠  혼다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입니다. 미카와국 구라마에에서 혼다 타다토요의 장손이자, 혼다 타다타카의 장남으로 출생합니다. 관례 후 받은 이름은 타다카츠, 아명은 나베노스케, 통칭은 헤이아치로이죠.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리던 당시 풍습에 따라 보통 헤이하치로라 불렀습니다. 관직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우선하였기에 타다카츠의 경우는 보통 나카츠카사노다이후라고도 불립니다. 출생 직후에 오다 가문과의 전투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사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합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동이 됐다고 하며, 1560년에 관례를 치르고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라 칭하며 오케하자마 전투에 첫 출전을 합니다. 1563년 미카와에서 일어난 일향종의 난이 발생했던 그 당시, 대부분의 혼다 일족이 도쿠가와 가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타다카츠는 일향종에서 정토종으로 개종하며 도쿠가와 가문에 남아 무공을 세웠지요. 이후 1570년에는 이네가와 전투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군의 선두에서 대활약했지요.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은상을 수여받는 동시에 "혼다 타다카츠의 용맹은 삼국지 장비에 비견된다."고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1572년에 다케다 군이 도쿠가와령을 침곰했을 때 히토코토자카 전투에서는 패퇴하는 아군의 후위를 맡아서 분전했고, 그 활약을 지켜본 다케다 휘하의 무장 코스기 사콘이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가지 있으니, 당나라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로이니라."라는 낙서를 통해 그의 용맹스러움을 칭찬합니다.  말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측근을 혼다 마사노부 부자 등, 관료 타입의 문치파로 채웠고, 타다카츠 본인도 1604년에 병에 걸리면서 권력에서 멀어집니다. 1609년 경에 가독을 장남 혼다 타다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 이듬해 12월에 영지인 구와나에서 병사합니다. 같은 사천왕 동료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타다카츠의 후손들은 잦은 이봉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나마 야스마사의 후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20세의 나이로 임진왜란 총대장을 맡은 "우키타 히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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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키타 히데이에  히데이에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요이고, 아명은 하치로입니다.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으로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 석의 다이묘였지요. 히데이에의 별명은 비젠의 재상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170cm의 큰 키를 가졌었고, 아버지와는 다르게 성실하고 인정이 깊었다고 하네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고 임진왜란에서는 20세의 나이로 총대장을 맡았으며, 1년 후 행주대첩에서 승자총통을 연결한 변이중 화차의 포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8살 경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배했습니다. 그리하여 83살에 사망하는 그 날까지 무려 55년 동안 태평양의 작은 섬 하치조마치에서 유배 생활을 합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1581년 부친인 우키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10살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2년 가독을 계승하고 영지를 보장받게 됩니다. 이후 우키타는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의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히데요시는 말년에 요도도노가 아들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를 낳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를 많이 들였으며 우키타도 아들처럼 여기며 매우 아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 후계자였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죽고 다른 양자들이 다른 집안으로 보내지는 와중에도 히데이에는 양자로 잘 살았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우키타 히데이에는 총대장 겸 제8군 사령관으로서 참전합니다. 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의 굵직한 전투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를 아꼈던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키면 조선의 통치자로서 히데이에를 임명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신뢰받는 양자였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서군에 속하여 초반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배신으로 전세가 급속히 불리해지자 결국 패배,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로 도망칩니다. 곧 시마즈 가문이 그를 숨기고 있다는 ...

일본 전국시대 3효웅 중 한 명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 '사이토 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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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도산  사이토 도산은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으로 유명하죠.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의 전반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크게 전반부의 주역은 사이토 도산, 후반부의 주역은 도산의 제자이자 정신적인 후계자처럼 묘사되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오다 노부나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산은 살모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이에 걸맞게 '하극상의 효웅', '오다 노부나가의 스승 겸 장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행적이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정확한 인물상이나 행보를 명확히 하기는 어려운 인물이죠. 살모사라는 별명 역시 사료나 문서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현대 소설의 창작입니다. 정실 부인 오미노카타는 아케치 집안 출신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고모에 해당됩니다. 이 정실 부인의 소생이 키쵸, 흔히 노히메라 알려진 여성입니다. 그래서 미츠히데는 도산의 조카가 됩니다. 사이토 도산은 기쵸를 아주 사랑하여 '바보'라는 소문이 난 오다 노부나가와 결혼시키는 걸 상당히 꺼렸습니다. 도산은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에게 여러 번 겨뤘는데 다 이겼습니다. 사실 딸을 보냈을 때에도 '바보'라고 소문난 오다 노부나가를 잘 구슬려 오다 가문의 땅을 차지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쇼토쿠사라는 절에서 직접 만난 후 오다 가문의 땅을 빼앗을 생각이나 의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도와주는 모습이 보였는데, 이게 많은 소설가들과 사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이 첫 번째 만남에서 효웅 도산을 감복시킨 천재 오다 노부나가의 모습이 일본 역사 소설에는 꽤나 많이 차용되는 소재이지요. 실제 역사에서 도산이 노부나가에게 첫 만남 이후 감복해 전폭적으로 도와주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애초에 '도산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감복했다.'는 기록 자체가 오다 가 측의 사료이죠. 사이토 ...

서국 제일의 다이묘이자, 모리 가 3형제의 아버지인 "모리 모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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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 모토나리  모토나리는 일본 센고쿠 시대에 오늘날의 히로시마현 서부인 아키의 다이묘입니다. 여러 가지 모략으로 유명해서 모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며 서국 제1의 다이묘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모리 가문 3형제의 아버지이기도 하죠. 아들들의 성씨가 각각 다른데, 다른 집안에 일단 양자로 넣은 후 모략으로 해당 가문의 영지를 집어삼켰기 때문입니다. 1497년, 아키의 호족인 모리 히로모토와 역시 아키의 호족으로 모리 가문의 방계 출신 후쿠바라 부인의 2남으로 태어납니다. 젊은 시절에는 당대의 주고쿠 지방에서 전통의 오우치 가문과 함께 양대 세력으로 떠올랐던 신흥 강자 아마고 츠네히사의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지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는 5세 때 잃고, 아버지는 10세 때 잃고, 형은 19세에 잃었네요. 17세 때는 명나라 사람들이 모리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들 중 관상을 잘 보던 사람이 모토나리를 보고는 한 고조, 당 태종의 풍모가 있다고 평한 적도 있습니다. 외교와 모략에 능통하여, 신흥 강자인 이즈모 아마고 가문과 전통의 명문인 스오우 오우치 가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가문을 보전합니다. 한편, 그의 모략의 특징은 장기간에 걸쳐 끈기 있게 계략을 짠다는 것으로 화려함은 없지만 주로 내부의 정치적인 조략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 편이었죠. 세 화살의 교훈이란 얘기로도 유명합니다. 모토나리가 세 아들을 불러 놓고 화살 하나하나는 쉽게 꺾이지만 화살 세 개를 한꺼번에 꺾을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며 형제 간의 우애 및 가족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내용이죠. 정실 사후에는 측실을 들였고, 측실과 유능한 아들들이 그를 계속 보좌했으며 금주를 생활화하는 것처럼 평생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에 측실들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막내는 71세의 나이에 얻었다고 합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모리 히데카네로, 형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도요토미에 인질로 들어가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의형제...

임진왜란 시기 대마도의 다이묘였던, 소 요시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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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요시토시  요시토시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쓰시마 섬의 다이묘입니다. 기리시탄(기독교)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다리오(Dario)이죠.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니시의 사위이지요. 요시토시는 원래 종교가 없었으나 장인의 권유로 가톨릭에 입교하고 독실한 신자가 됩니다. 무엇보다 조선에게 중요한 점은 그가 임진왜란 시기 대마도의 다이묘라는 점이고요. 대마도는 원칙적으로는 다이묘 집안이 일본계인만큼 일본 영토를 지향했으나 실질적으로 당시 반조선 반일본 같은 반반 포지션을 가져가던 지역이기에, 대마도 다이묘(당주)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했습니다. 또 당주 후계자로 어릴 때 낙점되면 10대 이전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었고, 늦게 낙점된 사람도 바로 조선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당연히 소 요시토시도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쓰시마 소씨 20대 당주였으며, 한국 측 기록에서는 주로 한자를 그대로 읽어 종의지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임진왜란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 중 하나였으며 전쟁 도중과 이후에도 조선과 일본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다면적인 인물입니다. 1568년, 소 요시토시는 15대 쓰시마 당주 소 마사모리의 4남으로 태어납니다.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죠. 그러나 양자들이 계속 죽으면서 소 요시토시가 11살에 가문 제 20대 당주가 됩니다. 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당주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이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대마도의 영지를 인정받습니다. 1592년,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를 출...

아시가루에서 32만 석의 다이묘가 되는 엄청난 출세를 이룬, "토도 타카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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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도 타카토라  그는 전국시대부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입니다. 몇 번이고 주군을 바꾼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워낙 유명하고 스케일이 커서 가려지는 면이 있지만 토도 타카토라도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가루에서 다이묘가 되는 엄청난 출세를 이룹니다. 축성의 달인이기도 하여 생애 무려 20개의 성을 축성했다고 합니다. 1556년 정월 6일에 오우미국 이누카미군 토도무라에서 토도 겐스케 토라타카와 묘세이 부인(도라)의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1569년 키나이에 영향력을 뻗힌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나가마사 등을 동원해 이세로 진공하자, 형인 토도 겐시치로 타카노리가 나가마사를 따라 이세 공격에 참여합니다. 타카노리는 이번 전투에 선진을 맡아 오카와치 성을 공격했는데, 훌륭한 무위를 숙부 다가 신스케 요시마사와 함께 보여주었으나 전사하고 맙니다. 이렇게 형을 잃은 토도는 약 1년 뒤인 1570년에, 형과 똑같이 나가마사를 따랐죠. 동월 즈음 벌어진 아네가와 전투에도 참가해, 어린 나이에도 적의 수급을 하나 취하는 군공을 올립니다. 1582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야마자키 전투를 일으키자 여기에 따라 가 선봉으로서 공을 올립니다. 이후 타키가와 가문과의 전투에도 참여했고, 주군 히데나가는 하리마와 다지마의 2국을 가지는 한 명의 다이묘로 올라가는 것에 성공합니다. 히데나가는 곧 다지마에 입부했지만 마땅한 성곽이 없었기에 아리코야마 성 주변의 이즈시에 성을 하나 만들 것을 명령했는데, 타카토라도 이 명령을 받아 양성을 개축하는 것은 물론, 히메지와 이즈시에서의 통치도 맡게 됩니다. 1592년 타카토라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지만 이순신을 만나 그 동안의 명성과 달리 옥포해전 등에서 패배하고, 정유재란 때 원균을 상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하지만 다시 이순신과 명량해전, 절이도 해전 등에서 맞붙어 패배합니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과 싸웠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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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입니다. 이요국 오즈번 초대 번주이며 다쓰노번 와키자카씨의 시조이고, 이와지국 스모토번주이죠. 와키자카는 덴분 23년 오우미국 출신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장남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재혼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된 것이며 본래 이름은 다무라 진나이였죠. 본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지만, 1573년 아자이가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부장이 돼 단바 공략전에서 공을 세웁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를 떠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가 그 밑에서 히데요시의 쥬고쿠 평정전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았습니다. 주로 와키자카는 육전에서 다양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후 해적 집단이 주둔 중이던 영지를 받아 1585년 무렵부터 수군 지휘관을 담당합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까지 수군 담당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와키자카가 원래부터 수군 담당이라고 잘못 알고 있지요. 원래 해적 출신이던 구키 요시타카를 제외한 다이묘들 중에는 와키자카처럼 해적이 있는 영지의 다이묘가 되면서 전직하게 된 케이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군으로 참전해 육군을 따라 도성까지 진격했으며 도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경상, 충청, 전라 연합군 7~8만의 조선군을 공격해 패퇴시킵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떤 무인도에 고립돼 버렸는데 거기서 10일간 표류하며 섬에서 나는 미역을 먹으며 조선 수군이 수색을 포기하기만을 기다려야 했지요. 이후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나타난 구조선을 통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와키자카 가문은 지금까지도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7월 8일에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이 생겨났죠.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본래 ...